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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세계 유일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 탑골승방 보문사


한국의 비구니문중은 약 11개 있다. 청해, 계민, 법기, 삼현, 수정, 봉래, 육화, 실상, 보운, 일여문중과 보문종긍탄문중이다. 그 중 대한불교 보문종은 비구 비구니의 차별을 받지 않고 비구니의 위상을 세워 독립적 위치를 인정받기 위해 1972년 새롭게 창종한 세계 유일 비구니 종단이다.


최초의 비구니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붓다의 이모이자 양모)를 종조로 모시고, 신라 때의 비구니 법류를 중흥조로 삼고 있다. 한국불교 26개 종단의 하나이며 대한불교조계종과는 별개이다. 보문종 총본산 탑골승방 보문사(주지 은태 스님,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를 찾아 900년 동안 비구니들만의 힘으로 어떻게 보문사를 지키고 키워왔는지 살펴봤다.





대한불교 보문종 창종의 계기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불교 정화운동 명분을 내세워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고 비구승만 절을 지키라는 유시를 발표하면서 대처와 비구가 싸우게 됐다. 이때 보문종 초대 총무원장 은영 스님은 어지러운 불교계 현실에서도 비구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대중을 인솔해 법문을 듣는 등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사태가 잘 마무리되기를 발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문사는 비구와 대처의 대치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왜냐하면 대중교육과 수행지도를 맡았던 대부분이 대처승이었고, 대처승이 주지로 있는 용주사의 말사였기에 더욱 곤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학원에서 큰 법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큰스님이 비구니를 폄하하는 말을 들으면서 독립된 종단을 계획하게 되었다. 1971년 재단법인 보문원을 세우고, 어렵게 문공부의 승낙을 받아 1972년 세계 유일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 승인을 받았다. 초대 종정 설월당 긍탄 스님, 초대 총무원장 은영 스님은 어떤 분들일까.




은영 스님, 사바세계 중생의 고통 덜어주려
인간의 몸 빌린 보살의 화현


1910년 충남 대덕군 부면 미호리에서 출생, 태어난 아기는 여자아기인데, 모습은 꼭 사내아이 같았다고 한다. 태몽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망망대해에서 붉은 연꽃이 솟아올라 앞으로 다가오더니 치마폭에 안겼다. 그 연꽃을 조상 위패를 모신 사당에 올려놓으려 하자 사당이 부처님 모신 법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점지해 주셨구나 생각하며 생김새가 걸작이라 이름을 걸례(傑禮)로 지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매를 맞고는 병을 얻어 3년을 누워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학사에서 기도하면서 남편을 낫게 해주면 자식 하나를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간절한 기도때문인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제는 부처님과의 약속. 이러한 사연을 듣게 된 걸례는 가족을 위해서 부처님을 시봉하겠다며 1918년 9세의 어린나이에 동학사로 출가했다.


1919년 만호 강백과 대은 스님께 경전을 이수하고, 설월당 긍탄 스님을 은사로 은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은사 긍탄 스님은 1885년 왕십리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스님을 보문사 세장 스님에게 출가시켰다. 워낙 영민하여 11세 때는 범패, 바라, 나비, 도량게 등 모르는 의식절차가 없을 정도였다.


1912년 보문사 주지로 취임했다. 스님은 금강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정진하고 머무는 암자마다 화주와 시주를 도맡았다고 한다. 6명의 상좌 중 맏상좌 은영 스님에게 절을 맡기고 정진에 몰두하던 어느 날 새벽, 상서로운 광명이 보문사 도량에 가득하던 그날 앉은 채 입적했다. 1980년, 세수 96세 법랍 90세였다.


은영 스님은 1920년 긍탄 스님을 따라 보문사로 왔다. 그때 보문사는 청운이라는 사람이 땅을 다 팔아먹고 도망쳐서 대중은 흩어지고, 법당은 엉망진창이었다. 은사 스님과 여기저기 탁발을 다니기도 했으나 절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은사 스님이 병을 얻자 은영 스님은 14세 어린 나이에 보문사의 살림을 책임지게 됐다. 1981년 세수 72세, 법랍 64세 이생의 인연을 떠나 열반하기까지 조금의 시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수행에 정진했다고 한다.





탑골승방 보문사
그리고 기도처로 유명한 석굴암


고려 시대 담진국사가 1115년(예종10)에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창건했다. 탑골승방은 서울의 낙산 아래 동망봉을 경계로 청룡사·미타사 등 비구니 도량이 모여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보문사는 조선시대 탑골승방이라 불리는 옥수동의 두뭇개승방, 석관동의 돌곶이승방, 숭인동의 새절승방과 함께 성 밖에서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사찰 중 하나다. 또한, 단종의 비 정순왕후와 연관된 동방봉과 이웃해 있어 보문사가 왕비와 후궁들의 기도처였다.


은영 스님은 평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비구니들이 여자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머리를 빡빡 깍고 승려노릇을 하는 것은 얽매인 인연에서 영원한 자유를 알고 장부의 일을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출가한 뜻을 바로 알고 바로 살아 아침저녁 바라보는 우리 부처님 면전에 부끄러움 없는 수행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며, 시대가 변하면 비구니의 위상도 변할 거라고 예언했다.


8년간 탁발 수행도 계속됐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발뒤꿈치가 갈라지고 피가 나기 일쑤였다. 그렇게 진실한 스님을 지켜보던 한 보살이 대웅전 불사에 써 달라며 가진 것을 처분하여 시주금을 냈다. 하지만 중창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법이란 이런 것인가. 지해룡 거사가 돈을 맡기면 두배로 불려 주겠다고 하여 돈을 맡겼다. 그런데 자신은 오래 못 살것 같다며, 불린 돈에 더 보태어 주고는 운명했다. 지해룡 거사의 아들 지운양 거사가 아버지의 사십구재를 지내는데, 법당이 기울어 위태위태하자 선뜻 시주금을 또 내게 됐다. 1928년 보문사 중창불사의 시작이다.




그 후 선불장, 산신각, 칠성각, 극락전, 시왕전, 보광전 등 불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복지와 포교 불사에도 앞장섰다. 시자원, 법보전, 동원정사, 만불전, 은영유치원과 은영 어린이집 등.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어린이법회와 청소년법회도 활발하다. 또 군포교 활동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지원스님이 16년째 전담해오고 있다. 여러 불사 중 가장 큰 원력을 세운 곳이 석굴암 불사다. 절을 찾는 사람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곳을 고민했다.


한봉덕 화백에게 설계를 의뢰하니 경주 석굴암과 똑같이 조성하는게 어떻겠냐는 의견에 대작불사가 시작됐다. 1970년 8월에 시작하여 23개월 동안 4500여명에 이르는 조각가 석공 등이 참여했고, 호남지방의 화강석과 경기석 등 총 2,400톤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불상은 15톤의 원석으로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3.38미터다. 기도가 잘 이루어진다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보문사 주지 인태 스님에게 듣는 생전예수재 2017년 7월 4일(음력 5월 11일) 지장전에서 생전예수재 회향과 영산재가 봉행됐다. 지난 5월 17일 생전예수재 입재를 시작하고, 7일 간격으로 49일 동안 초재, 2재~6재 그리고 회향의식이 이어졌다. 새벽부터 시작해 바쁘게 움직이느라 점심 공양도 건너 뛴 주지 인태 스님과 잠깐 짬을 내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생전예수재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내가 죽기전에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등 미리 업장을 소멸하고 공덕을 닦는 천도재입니다. 생전예수재의 원명은 예수시왕생칠재(預修十王生七齋)로 예수는 ‘미리 닦는다’는 뜻이고, 시왕은 큰 사찰 시왕전이나 지장전에 호위로 모셔진 명부의 열 명의 왕을 나타내며, 생칠재는 살아 있는 사람의 7·7재, 곧 49재를 의미합니다. 윤달에만 지내는데 2020년에 또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죽은 사람을 위한 49재는 익히 알았지만, 산 사람의 49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불교의식에 대해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인태 스님은 시흥에서 출생하고 7살 때 순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랍 61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외로움이 무엇인지 몰랐고 조금 크자 머리 깎고 학교 다니던 여고시절 놀림이 싫었다. 머리를 기르고 고교를 졸업했으며, 대학입학 때는 다시 삭발한 모습의 사진을 입학원서에 넣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주지 소임을 맡은 지는 8년째다.





보문사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렸다. “법인과 종단이 각각 분리되어 있으며 중실, 남별당, 동별당, 서별당, 청화당의 5별당이 역할을 나누어 운영하고 50개의 말사가 있습니다.”라며, 1936년 비구니의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초·중·고·대학 과정의 불교전문 비구니강원을 개설했다고 말했다. 당시 150여명 스님이 있었으며 지금은 60여명 있다. 비구니의 위상은 많이 높아졌다. 덧붙여 전통 범패에 대해 이야기했다.


“범패는 부처님 덕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은영 스님은 불교 전통의식에는 범패사가 필요하다고 여겨 신심으로 재를 잘 지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의식을 두루 배웠습니다. 특히 스님의 회심곡이 듣기에 얼마나 좋았으면 49재를 올리는 사람들이 모두 청할 정도였죠.”라며, 스님의 발자취를 떠올릴적마다 눈시울을 적셨다.


그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경심이 느껴졌다. 스님은 한 시대에 은영 스님처럼 큰스님이 보문사와 인연되어 한 번 더 대형불사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보문사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 항상 앞장서서 나가고 있는 총무 자문스님, 교무 경진스님, 재무 도은스님 등이 있어 힘이 된다고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3만평의 도량이 예전과 달리 지금은 아파트 숲속에 가려져 지역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세월이 되었네요. 외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어요. 지금처럼 여법하게 매월 정기적으로 소외 어르신 가구에 쌀을 지원하고, 서울노인복지센터 봉사활동과 어린이 보육사업에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템플스테이를 축약한 반나절 과정의 템플라이프 과정이 있습니다. 사찰 문화를 이해하고 명상, 108배, 포행 등 생활의 활력과 재충전을 이곳 보문사에서 하면 어떨까요.”라는 화두를 남기고 바삐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 사람의 49재 생전예수재를 보며


저승에서의 하루는 이승에서 30년, 백세까지 산다고 해도 저승에서 3일 한나절에 불과한 찰나의 인생이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마음의 때를 묻히고 떠날 때 후회하며 아쉬워한다. “저승갈 때 뭐 가져 갈 건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그래서 윤달에만 기도할 수 있는 산 사람의 49재 의미가 남다르다. 일반 기도는 한두 시간이면 끝나지만, 생전예수재는 49일 계속되고, 회향날도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독경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바라춤을 비롯한 정성을 보면서 없던 신심도 되살아 날 것 같다. 생전예수재에 인연된 모든 불자들은 복이 참 많다. 또한, 도시에서 삶이 힘들고 답답하면 보문사 석굴암을 찾아가 기도해보자. 고달픈 한숨이 조금 덜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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